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이난 전쟁 (문단 편집) === 와다고에 전투 === {{{+2 和田越の戦い}}}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 충배군을 의식하여 타바루자카를 포기한 사쓰마군은 부대 재편성을 수행하고 히토요시(人吉)방면에서 방어를 꾀하지만 정부군은 1877년 5월 하순부터 히토요시 방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 6월 1일 히토요시가 함락되면서 방어선이 무너진다. 사이고는 히토요시 함락 전에 이미 가고시마현 청사가 있던 미야자키로 이동, 독립정부를 선포하고 각 방면의 방어를 지시했다. 예하 사령관들이 지형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에게 몇차례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후장식]] 소총을 보유한 정부군에 비해 사쓰마군은 [[전장식]] 소총을 보유했고[* 전장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머스킷]]이며 후장식은 초기의 [[볼트액션]]식 소총이다. 전장식은 탄환을 비롯한 발사에 필요한 장약 등을 안에 쑤셔넣은 뒤에 발사해야 하는 등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림에 비해 후장식은 [[탄피]]를 사용하기 때문에 탄환을 넣은 뒤에는 쏘고 볼트를 당기고 다시 쏘면 되어 동작이 단순하고 시간도 절약될수 있다. 게다가 전장식은 이 특유의 발사 순서로 인해 엎드리거나 누워서는 장전이 안되는데다 한번 쏜 뒤에 다시 조준을 해야 하지만 후장식은 한번 쏘고선 거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도 장전과 발사를 할수 있다. 즉 연사력과 명중률에서 후장식이 전장식에 비해 우월했다.], 병력 차이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결국 총공격이 이루어진 7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사쓰마군의 각 방어선은 함락되었고 대대적인 패주가 이어진다. 미야자키도 8월 14일에 함락되어, 사쓰마군 잔존병력은 겨우 3천 명에 불과했던 반면 정부군은 7개 여단 3만 5천명에 달했다. 이대로는 패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사쓰마군은 최후의 발도 돌격을 결의한다. 정부군이 주재하고 있는 논밭 지역과 구마다 분지를 감싸고 있는 에노다케~와다고에 능선은 약 40m의 높이를 가진 곳으로 사쓰마군이 방어를 하든, 정부군이 방어를 하든 어차피 와다고에 능선을 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쓰마 군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직접 독전을 하는 가운데 8월 15일 오전 8시,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총병력 3천에 대포 3문에 불과한 장비로 감행한 발도 돌격은 예상외로 정부군의 화력의 우세를 제압하고 정부군 제4여단과 별동 제2여단을 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곧 시작된 정부군의 함포 사격을 통해 사쓰마군의 포대가 파괴되고, 화력의 우세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정부군의 공세에 정오 즈음에는 승패가 결정나고, 사쓰마군 잔존병력은 능선을 타고 에노다케 방면으로 도주를 개시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즈음 칼을 빼들고 싸우다 죽겠다고 나섰으나, 간부들이 강제로 팔을 붙들어 에노다케 방면으로 끌고 도주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